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벤저민 디즈레일리 (문단 편집) === 말년 === 수상으로 재임하면서 그의 건강은 악화일로를 걸었고, 1878년 이후로는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였다고 한다. 또 1870년대 후반 영국 내의 흉년에 대한 대책으로 값싼 미국산 곡물을 수입해오기로 결정하면서 [[농민]]들이 보수당 지지에서 이탈하기 시작한다. 또한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줄루]]랜드 침공은 아무리 [[제국주의]]의 시기였다고 할지라도 구실도 없이 무작정 쳐들어가는 비도덕한 외교술로 여겨져 대중들에게서 지지를 받지 못했을 뿐[* 게다가 줄루랜드를 나중에 점령하고 식민지로 만들었으나 총도 없는 야만인이라고 얕보던 줄루 군대와 전투에서 영국군은 예상을 뛰어넘는 전사자를 내야 했기에 여론과 언론에서 쓸데없는 전쟁으로 영국 젊은이들을 죽였다고 신나게 디스당했다. 사실, 이건 억울한게 줄루 족에게 반발하던 코피 족이나 여러 민족들이 영국군을 적극적으로 도왔지만, 영국군은 당시 같은 흑인끼리 짜고 통수를 칠 것이라고 믿어 이들을 무시했고 심지어 이들이 수만여명 몰려와 영국군을 도와 줄루 색히들을 조지겠다라고 할때도 일부러 후방에 배치하게 하지 않나, 이들이 총기를 제공해달라고 할때도 무시했던 결과였다. 결국 연대가 전멸하는 참패를 당하고 나서야 다른 흑인 민족들을 믿고 총기를 제공했더니만 무섭게 줄루 군대를 뭉개며 잘 싸웠고 총도 알아서 잘 반납했다. 이를 두고 영국군 간부들이 진작에 믿어야 했다고 후회했을 정도.]만 아니라, 정적인 글래드스턴에게 공격의 구실로 작용한다. 결국 1880년의 총선에서 그와 보수당은 참패하고 글래드스턴이 다시 수상으로 등극하면서 그는 물러나게 된다. 수상직에서 내려온 뒤에도 그의 건강은 회복되지 못했고, 물러난 지 1년이 조금 안 됐던 1881년 4월 19일에 세상을 떠난다. 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혼란스러울 것을 우려해 사적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는 디즈레일리를 아낀 빅토리아 여왕과 수상 글래드스턴이 참석했다. 다만 글래드스턴의 경우, 여왕의 강권으로 마지못해 참석한 것이며 참석하고 나서도 "평생토록 이렇게 추도사를 읽는 게 힘들었던 자리는 처음이었다."고 불평했다고 전해진다.(...) 죽어서까지도 화해하지 못했던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